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퐁파두르 부인 (문단 편집) == 고된 궁전생활 == >"내 인생은 끔찍해요. 단 1분조차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어요. 끝없는 집견과 반복되는 의무적인 행사들, 1주일에 2번 넘게 뮈에트성 같은 작은 성들 사이를 끊임없이 떠돌아다녀야 하는 여행의 연속, 언제나 사려 깊게 행동해야 하는 왕후나 왕세자, 왕세자비에 대한 의무..." >----- >1749년에 퐁파두르 부인이 보낸 편지. 고된 궁정생활에 대한 퐁파두르의 고뇌가 잘 느껴지는 내용이다. 사실 퐁파두르 부인의 업무는 정부 관료나 정치가가 하는 일을 겸하는 중노동이었다. 심지어 퐁파두르가 낳았던 유일한 자식인 딸 알렉상드린이 죽고 외손녀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퐁파두르의 친정 아버지도 연달아 죽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퐁파두르 부인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화장]]을 하고 왕을 위해 웃고 떠들면서 연회에 참석해야만 했다. 그런 퐁파두르 부인을 지켜본 주변의 몇몇 귀족들도 그녀를 동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에 덧붙여 왕의 [[성욕]]이란 성욕은 모두 감당하면서 만찬이나, 무도회에 빠짐없이 나가고 그 시간을 쪼개서 미모를 유지하기 위한 운동까지 해야 했다. 왕을 위해서(왕의 총애를 위해서가 아니다!) 미모를 유지해야 했고 그 때문에 살이 쪄서는 안되니까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서 [[승마]]를 해야 했다. 사람이 이렇게 살면 병이 나지 않을 수가... 게다가 사람이 늘 성관계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닌데 그런 날도 예외 없이 왕의 상대가 되어주어야 했다. 나중에 [[포주|뚜쟁이]]로도 악명을 날렸는데 왕이 요구하는 어린 처녀를 그녀가 대령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녀가 죽었을 때, 그녀의 정적들은 묘비명을 "20년을 [[처녀]]로, 15년은 [[창녀]]로, 7년을 뚜쟁이로 산 여인, 여기 잠들다."로 하자며 비아냥댔다(출처는 <왕의 정부> [[한국어]] 번역본).] 루이 15세가 1750년대 후반~1760년대에 찾던 '파크 오 셰르'는 퐁파두르가 만들었다. 게다가 이렇게 대준 여자들이 왕의 정부 자리를 노리고 그녀를 모함하기도 했기 때문에 한시도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또한 퐁파두르를 공개적으로 저격한 노래 '푸아소나드'[* 결혼 전에 쓰던 성씨인 푸아송을 패러디했다.]가 유행한 후에는 살해위협까지 시달려[* 퐁파두르와 아벨이 모두 사망한 1781년에는 자녀가 없던 푸아송 남매의 유산을 누가 상속받을지를 놓고 법적 공방이 있었는데, 상속인인 푸아송 드 말보르생은 퐁파두르 때문에 피해를 봤다고 주장한 앙리 마제르 드 라튀드가 보상금을 요구하면서 재산 일부를 보상금으로 지급해야 했다. 그런데 드 라튀드는 1749년에 퐁파두르 살해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1777년까지 바스티유에 갇혔던 사기꾼이었다.(출처는 권력과 욕망 한국판 246~247페이지)] 스스로 요리를 챙겨먹을 정도로 사방의 적들을 경계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사실 딱히 퐁파두르 부인만 감수해야 했던 것은 아니다. 역대 왕의 정부들은 다들 저렇게 살았다. 뚜쟁이 노릇까지 한 건 퐁파두르 부인이 거의 최초지만. 그리고 이러한 온갖 고행에 대해서 퐁파두르도 스스로 "나는 그를 사랑했다. 1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나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다. 그의 옆에 있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못 할 게 없었다. 그러나 그가 왕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를 절대로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친구에게 쓰는 편지에 글을 적었다고 한다. 사실 퐁파두르 부인이 역대 [[부르봉 왕조]]의 정부들 가운데 욕을 많이 먹었던 이유는 바로 그녀의 출신이 [[부르주아]]였기 때문이다. 퐁파두르 부인의 어머니는 문란한 행실로 유명했고 아버지 또한 [[세금]]을 떼먹고 도망간 전적이 있는데다, 그 아버지가 퐁파두르의 친부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을 정도로 출신에 대해 말이 많았다. 때문에 귀족들은 정부가 된 이후로 항상 [[루이 15세]]를 위해 오페라와 희곡를 열고 도자기와 보석, 그림을 사들이는 퐁파두르를 두고 "부르주아 출신 주제에 사치를 부린다"며 비난했다. 거기다 퐁파두르가 20년 동안 루이 15세의 곁에서 여러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아니꼬워했다. [[루이 14세]]의 말년을 지킨 그의 정부 맹트농 후작부인[* 루이 14세의 정부 중 가장 총애받은 여인으로, 왕비 마리 테레즈의 사망 이후 루이 14세와 결혼식까지 올렸다. 다만 [[귀천상혼]]인지라 프랑스의 왕비로 인정받지 못했다.] 역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이는 루이 14세의 왕비 [[마리아 테레사(스페인)|마리 테레즈]]가 사망하면서 왕비 자리가 공석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하지만 퐁파두르가 정부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루이 15세의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가 멀쩡히 살아있었다. 게다가 이 마리 레슈친스카는 후계자를 낳고 공식적인 업무를 이행하는 등, 왕비로서 딱히 흠이 없는 여인이였다. 당연히 사람들은 일개 정부에 불과한 퐁파두르 부인이 아닌, 왕세자의 모후이자 신실하고 조용한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의 편이었다. 측근도 입에 오르내렸다. 남동생인 아벨 푸아송(1727~1781)도 누나가 왕의 애인이 된 덕으로 마리니 후작으로 임명되어 왕의 건축 담당자로 출세하였다. [[프랑스 파리|파리]] 시민들은 왕실해양 서기관 모르파 백작의 실각 뒤에 퐁파두르가 있다 믿었고 공공연히 푸아송에서 딴 노래인 푸아소나드를 부르며 조롱했다. 하지만 나라에서 지급하는 5만 리브르의 연봉 외에 여타 수입은 없어 자주 빚을 졌고, 빚을 갚기 위해 선물로 받은 보석이나 그림을 팔았다. 평생 자선사업도 많이 한 탓이기도 했다. 결국 사망한 뒤 남긴 돈이라고는 책상 서랍에 있던 370리브르가 전부였다. 당시 파리 오페라의 6개월치 좌석을 예매하는 금액이 600리브르였다. [[루이 15세]]는 퐁파두르 부인이 항상 자기 근처에서 식사하기를 요구했다. 퐁파두르는 루이 15세만큼 대식가가 아니였지만 왕인 루이 15세가 요구했기 때문에, 자신의 위에 허용하는 양과는 관계없이 무조건 먹어야만 했다. 기름진 고기 위주의 궁중식단은 퐁파두르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웠지만 아무리 배가 불러도 만찬 자리에서는 억지로 다 먹어 치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먹은 음식이 살로 가지 않도록 운동도 빡세게 해야 했다. 왕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이 삶은 퐁파두르에게 있어서 매우 고된 것이었다는 점은 위의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게다가 그녀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왕과 오랜 동안 연인관계를 유지했는데도 한 번도 왕의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1746년과 1749년에 루이 15세의 아이를 가지긴 했으나 모두 [[유산(의학)|유산]]했고 몸이 허약해져 다신 [[임신]]하지 못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과 딸을 낳았고 왕도 많은 적자녀와 서출들이 있었던 만큼 일단 양자 모두 문제는 없는 듯하다. 그러나 그녀가 남편과 살 때에도 몇 차례 유산한 데다가 그나마 살아서 낳은 아이들은 허약해 모두 요절한 점, 그녀가 당시에는 치료가 사실상 불가능한 부인과 질환을 달고 살아서 나중에는 시침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정도였던 점을[* 심한 냉증이 있어서 불감증이 왔다고 한다.] 감안하면 원체 몸이 좋지 못했던 그녀가 고된 궁정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 탓에 더 허약해져 후천적 [[불임]]이 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녀는 간절히 낳길 바랐던 왕의 자식을 끝내 낳지 못했고, 이것은 그녀를 심적으로 상당히 괴롭혔다. 이에 대해서 비화도 있다. 퐁파두르의 말년에 왕의 공식 애첩 자리를 노리고 그녀를 모함했던 한 귀족 여인이 [[루이 15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쫓겨나는 일이 있었다. 이후에도 그 귀족 여인은 미련을 버리지 못해 루이 15세의 아들을 낳자 자신의 갓난 아들을 데리고, 공원에 산책을 나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모유 수유]]를 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퐁파두르 부인은 변장을 하고 그 모자의 모습을 멀리서 말없이 지켜보았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이 낳지 못한 왕의 아이를 낳은 그 귀족 여인을 상당히 부러워했던 듯. 더구나 그 상황에서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이 모두 요절해서 심적 고통이 상당했다고 한다. 특히 기숙학교에 있던 딸 알렉상드린이 겨우 10세의 나이로 병사해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을 때, 아예 자신의 삶에서 모든 기쁨이 사라졌다고 말할 정도로 상심했다. 푸아소나드가 유행한 1756년부터는 살해위협에 늘 시달렸고 언제 독살당할지 몰라 반드시 자기 처소에서 하녀를 시켜 만든 음식만 먹었다. 실제로 퐁파두르 부인은 [[베르사유 궁]]에 들어간 지 5년 만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미모를 잃고 말았다. 극한의 경쟁과 암투가 난무하는 궁정생활은 아름답고 건강하던 퐁파두르 부인을 말라 비틀어진 쇠약한 노인으로 만들었고, 이후 퐁파두르는 [[편두통]]과 [[신경증]]에 시달리다가 [[결핵]]으로 죽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